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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14. <부정공>운포공휘동승묘표(雲圃公諱東承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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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정공>중강공휘동주묘갈명(重崗公諱東宙墓碣銘)
重崗公諱東宙墓碣銘 君諱東宙 初諱光萬 字子一 號重崗 趙氏玉川人 系出于高麗門下侍中諱璋 六傳諱智崙厚陵叅奉 出爲三禮道察訪 兄弟四人 築相好亭于謙川之上 日夕寝處 友愛湛樂三傳諱大成號梅窓勵節校尉 贈户曹佐郎 享曲水武曲兩祠 其子諱恰 號蓮潭 以進士孝友文章 見稱于世 四傳諱俠天性仁孝 學識高明 於君九世也 高祖諱斗采 曾祖諱昌源 祖諱民九 考諱淵湑號竹南 妣全州崔氏英淳女 國恥後甲寅十月四日生君 而君心性剛直 儀表端雅 早受書法于其考竹南公 而書體勁遒 如其爲人 孝父母友兄弟其家風也 余嘗僑居于光州 一日君來訪始通姓名 與之酒數巡 語偶及書法 君曰書雖小技 其妙無窮 楮河南之用筆 如印泥劃沙 是貴得體也 敷道人之作字 肥字須要有骨 瘦宇須要有閒 是貴得體也 蘇東坡曰 眞書難飄揚 草書難嚴重 大宇難結密 小字難寬綽而有餘 是貴抑揚得中也 余素味於書法 聞其語而審恍惚難定 然因知君爲書法人 以故心相許 有相往來也 其後余遊谷城南原等地 墓碑亭額 多君所題也 且其考明地理 卜一基于南原松東面新基里 而植屋三四間 置田庄五六斗 命君居之 於是君竹山舊有田庄 悉付于妻子 及以單身 携一丁 往居新基三十餘年 其若可知也 然君立志又篤 修行且高 名大著于 北道士林間 顧余未守先庄 棲息城市者 可無愧君哉 光復後庚午三月八日卒 墓石谷面柳亭里山四番地壹乾坐 配南平文氏溶漢女 壬子五月六日生 長男輯容生南奎彦奎基埈 次澯容生系 次政容生慶奎 次珠容生埰桓埰佑 長女適安忠善生泰斗 次適金萬喆生鍾寬鍾國鍾先 次適柳柱錫生 康烈幸烈贊烈 次適金漢昌生亨植李容在妻 次適朴贊淑生時雨杞雨 次適金泰銀生孝民亨民 次適朴成福生龍基 次適丁泓中生元基 鳴呼 君墓方謀石 其胤輯容 抄狀以來 懇懇求刻辭 試讀之 眞實無餙辭 彷彿乎與君對話一席 可無感古傷今之懷耶 銘曰 遵先命而分宅 能免析薪之議 閲百苦于殊鄉 可無渡淮之悲 由于孝而安分 君豈但書法人 刻懿行于牲石 昭昭示千百春 光復 五十四年 戊寅 坡平 尹丁鍑 중강공휘동주묘갈명(重崗公諱東宙墓碣銘) 군의 휘는 동주(東宙)요 또 다른 휘는 광만(光萬), 자는 자일(子一), 호는 중강(重崗)으로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장(璋)을 시조로 하며, 六세를 내려와 휘 지륜(智崙)은 후릉참봉(厚陵叅奉)으로 삼례도 찰방(參禮道察訪)을 지내고 형제 네 분이 겸천(謙川) 위에다 상호정(相好亭)을 지어 밤낮으로 같이 지내면서 우애하면서 즐겁게 지내셨다. 三대를 내려와 휘 대성(大成)은 호가 매창(梅窓)이신데 여절교위(勵節校尉)로 호조 좌랑(户曹佐郎)에 추증되셨으며, 곡수사(曲水祠)와 무곡사(武曲祠)에 배향(配享)되셨다. 그 아들 휘 이(怡)는 호가 연담(蓮潭)이신데 진사(進士)로 효우(孝友)와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알려지셨다. 四대를 내려와 휘 협(俠)은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럽고 학식이 고명하셨는데 공의 九세조이시다. 고조의 휘는 두채(斗采)요 증조의 휘는 창원(昌源), 할아버지의 휘는 민구(民九), 아버지의 휘는 연준(淵浚)으로 호는 죽남(竹南)이며, 어머니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영순(英淳)의 따님이신데 나라가 망한 후 갑인년 十月 四日에 군을 낳으셨다. 군은 성품이 강직하고 의표(儀表)가 단정하였다. 일찍이 아버지 죽남공(竹南公)에게서 서법(書法)을 배웠는데 그 글씨가 굳세고 힘이 있는 것은 마치 그 사람됨과 같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한 것은 그 집안의 가풍(家風)이었다. 내가 일찍이 광주에 임시로 살 때에 군이 찾아와서 비로소 성명을 통하고 함께 술 몇 잔을 나누다가 우연히 말이 서법에 미치게 되었다. 군이 말하기를 「글씨를 쓰는 것이 비록 하찮은 기예(技藝)이나 그 묘미(妙味)가 무궁합니다. 하남(河南) 저수량(楮遂良)의 용필(用筆)은 진흙에 도장을 박고 모래판에 그림그리는 것과 같으니, 이는 붓끝감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요, 부도인(敷道人)이 글씨를 씀에 살찐 글씨는 모름지기 뼈가 있어야 하고, 수척한 글씨는 모름지기 살이 있어야 하니, 이는 체격(體格)을 얻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요.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진서(眞書)는 드날리게 쓰기가 어렵고 초서(草書)는 엄중하게 쓰기가 어려우며, 대자(大字)는 빽빽하게 쓰기가 어렵고 소자(小字)는 넓고 여유가 있게 쓰기가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는 抑揚(억양)이 알맞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하였다. 내가 비록 평소에 서법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 말을 듣고는 마음이 황홀해져 어쩔 줄 몰랐으나 그걸로 인하여 군이 서법에 밝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서로 허여(許與)하고 서로 왕래하게 되었다. 그 후에 내가 곡성과 남원 등지를 유람하면서 보니, 묘비와 정자(亭子)의 간판 가운데 공이 쓴 것이 많았었다. 三, 四칸을 짓고 전답 五, 六두락을 사 놓고는 군에게 그곳에서 살도록 명하셨다. 이에 군은 죽산(竹山)에 있는 집과 전답을 모두 처자에게 주고 단신으로 장정(壯丁) 하나만을 데리고 신기리로 가서 三十年을 살았으니, 그 고생을 알 만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군의 입지(立志)는 더욱 돈독하고 수행(修行)을 더욱 높게 하여 높은 이름이 북도(北道)의 사림(士林)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니 나처럼 선장(先庄)과 물려받은 농토를 지키지 못하고 도시로 옮겨가 산 사람이야 어찌 군에게 비해 부끄럽지 않겠는가? 광복 후 경오년 三月 八日에 돌아가셨는데 묘는 서곡면 유정리 산 四—一번지 건좌(乾坐)이다. 배위 남평문씨(南平文氏)는 용한(溶漢)의 따님으로 임자년 五月 六日에 출생하였는데 아직 건강하시다. 장남 집용(輯容)은 남규(南奎) 언규(彦奎) 기준(基埃)을 낳고, 차남 찬용(澯容)은 출계하고, 그 다음 정용(政容)은 경규(慶奎)를 낳고, 다음 주용(珠容)은 채환(埰桓)과 채우(埰佑)를 낳고, 장녀는 안충선(安忠善)에게 출가하여 태두(泰斗)를 낳고, 다음은 김만철(金萬喆)에게 출가하여 종관(鍾寬) 종국(鍾國) 종선(鍾先)을 낳고, 다음은 유주석(柳柱錫)에게 출가하여 강렬(強烈) 행렬(行烈) 찬열(贊烈)을 낳고, 다음은 김한창(金漢昌)에게 출가하여 형식(亨植)과 이용재(李容在)의 아내를 낳았고, 다음은 정홍중(丁泓中)에게 출가하여 원기(元基)를 낳았다. 아, 군의 묘에 석물을 세우면서 그의 큰아들 집용이 행장을 초록하여 가지고 와 간절히 비문을 청하기에 시험삼아 읽어보니, 진실되고 꾸밈이 없어 군의 행적과 방불하여 군과 한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하니, 어찌 옛날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으랴.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버지의 명 따라 분가하였으니 遵先命而分宅 능히 석신의 비난 면하였고 能免析薪之議 타향에서 석신의 비난 면하였고 閱百若于殊鄉 고향 떠난 슬픔 없었으랴 可無渡淦之悲 효성을 다하고 분수를 편히 여겨 曲于考而安分 그대는 어찌 서예만 잘한 사람이랴 君豈但書藝人 비석에 아름다운 행적 새겨 刻懿行于牲石 천백년까지 밝히 전하리 昭昭示千百春 광복(光復) 오십사년 무인(戊寅) 三月 상순 파평(坡平) 윤정복(尹丁鍑)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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